농담.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둘 다 잘못된 믿음이다. 모든 것은 잊혀지는 것이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는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혀져 갈 것이다."(p.398-99)

"내가 이 세계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 아침, (뜻밖에도) 이 세계를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아주 쓸쓸한 모습으로. 이 세계는 화려한 치장과 광고로부터 버림받았고, 정치적 선전으로부터, 사회적 유토피아들로부터, 문화 담당 공무원 집단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이 셰계는 내 세대 사람들의 열정에 찬 지지로부터 버림받았고 (또한) 제마넥으로부터도 버림받았다. 이런 고독 속에서 이 세계는 정화되었다. 나에대한 꾸짖음으로 가득한 이 고독은 마치 얼마 살지 못하는 사람과 같은 이 세계를 정화시켰다. 그 고독은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최후의 아름다움으로 이 세계를 눈부시게 빛나게 하고 있었다. 이 고독이 그 세계를 나에게 되돌려준 것이었다." (p.423)

- 밀란 쿤데라 Milan Kundera, <농담 La Plaisanterie>, 1967. (한국어판 : 민음사, 1999)

by 박군 | 2009/10/19 00:21 | review | 트랙백 | 덧글(1)

20090930.

구월의 마지막 날이다. 어제 나는 중요한 시험 하나를 끝내서 참 기분이 좋았다. 좋았던 것은 아침 일찍 시험을 봐버렸기 때문에 어제 하루를 마음껏,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오롯한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제 점심은 요즘 통 집에서 밥을 먹은적이 없어 엄마랑 밥을 먹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다니는 운동 센터 근처에서 같이 밥을 먹었더랬다...

그보다 며칠 전, 나는 그가 받은 건강검진에서 무언가 이상 소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상 소견이 있던 사진을 보았었다. 내 짧은 전공지식으로 보아 그다지 좋게 생기지 않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 이후 더 자세한 검사를 했고, 그와 그의 남편 - 아빠 - 은 나에게 결과는 괜찮다고 말하였었다. ... 그들은 나에게 거짓을 말했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가 지금 가지고 있는 질병은 의학지식으로는 완치를 시킬 수 있는 질환이지만, 그 충격은 예상외로 훨씬 컸다. 그리고 이번 충격은 서서히, 서서히 엄습해오고 있다. 병원에서 아무리 비슷한 환자를 봐도 들지 않는 공포는, 결국 내 주변 내 가족에 와서야 그 공포가 느껴지는 것이다.

조금 오래 전,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심리테스트 하나를 한 적이 있다. 그 심리테스트에서 나는 부모를 가장 마지막까지 잡고 있을 거라고 한 친구가 말해주었다. 물론 그 자리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지금에 와서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이 나를 사랑했던만큼, 그들을 나도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정도가 친구들이 그들의 부모를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나에겐 큰 의미였을테고.

부모를 벗어나서 자신의 삶을 열어나가는 것이 더욱 더 큰 사람이 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틀의 부모를 벗어나는 일과 그들의 소중함을 느끼는 것은 다른 층위의 문제이다. 그들이 상실될 수 있다는 공포가 실재로 다가오는 것이 무엇보다 두렵고 무섭다. 너무 무섭다.

by 박군 | 2009/10/01 02:20 | 3rd diary | 트랙백 | 덧글(3)

교과서는 노동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땀흘리는 노동은 얼마나 아름다운가...하는 말은 이제는 더 이상 많은 이들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단지 자신의 몸뚱아리가 밥벌이의 밑천인 사람들에게는 살아내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잊은 채, 등 뒤에서 저열하게 침흘리는 '어떤' 낯선 다른 이에게 그들의 생산품을 헌납한다. 그리고 생산하는 사람들에게는 쥐꼬리만한 임금이 지급되고, 노동하지 않고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모든 생산품의 소유권을 가지게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후자는 전자의 일상 생활의 모든 곳에 영향을 미치며, 이윽고 전자는 후자에게 지배당한다.

노동자가 자본에게 착취당하는 현실은 1867년의 영국이나 2009년의 한국은 다르지 않다. 갈수록 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는 교묘해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적인 곳까지 내려가며, 우리의 시선을 헷갈리도록 교란시킨다. 자본은 그 자체가 가치추구의 대상이 됨으로써 자신을 키우려는 의지를 불사른다. 결국 자본은 자기 자신이 욕망의 대상이다. 욕망하는 자본은 인간을 한갓 소모품으로 보는 것이다. 자본가이든 자본 밑에서 그들의 이익 기여에 복무하는 노동자이든 결국은 모두 자본의 하수인일 뿐이다.

이번주부터 연재하는 <한겨레 21>의 르포기사는 마음에 든다. 기자들이 한 달 - 짧은 시간이지만 어쨌든 - 동안 미숙련노동자가 되어, 비정규직이 되어 가장 막다른 골목에 처해있는 우리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단다. 다시 한 번, 내가 받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그들을 생각할 시간인 것이다. 어떻게 그들의 삶을 나아지게 할 것인가를, 자본의 영속적인 승리를 끊을 수 있는 방도를, 반격하는 기회를 만드는 생각을 해야할 것이다. 자본이 아닌, 사람을 위한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이 진리로서 존재하는 명제다.

 

이번 주 (2009.09.21) <한겨레21> 노동OTL 기사.

나는 아침이 두려운 '9번 기계'였다. - 임인택 기자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5740.html

안산은 거대한 '인간 시장' - 김정효 기자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5739.html

(+) 싸이월드 미니홈피 게시판에 기사를 링크하고, 기사가 업데이트 될 때마다 링크를 추가할 예정이다.
http://minihp.cyworld.com/22911263/262458558

by 박군 | 2009/09/19 00:47 | progress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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